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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1910年3月26日死刑執行日

⛪康참어머님自敍傳「첫 만남」(日本語,10分半)


📚康オモニ自叙伝「初めての出会い」

(日本語, 10分半)


첫 만남


그날은 1952年 5月 10日 土曜日(토요일)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敎會에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범냇골에 산다는 이상한 청년을 만나봐야 되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만나 보고 똑똑하고 하나님께 쓰일 수 있는 이라면 전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敎會(교회)를 나섰습니다.


오후 4시경 길을 나서려니 비가 거의 그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이름도 알지 못했고 얼굴도, 집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여대생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남자들만 자취하고 있는 모양이라는 말만을 기억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범냇골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남자들만이 자취하는 집이 어디냐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기야, 그당시에 자취하던 남자가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리라,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 청년에게 인도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물어 보며 돌아다녔습니다.


얼마쯤 헤매다가 한 부인이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우물 옆에 허술한 집이 하나 있어요. 그 집에 청년 둘이 사는 듯합디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오르막길로 쭉 올라가니 과연 우물이 하나 나왔습니다. 양재기로 퍼 올리는 샘물 같은 우물이었습니다.


우물에서 손을 씻고 있으려니 곱게 생긴 한 아주머니가 물을 긷기 위해 우물로 나왔습니다. 연세는 한 오십여 세 쯤 되었는데, 피부가 깨끗하고 정정한 분이었습니다. 피난시절이라 국방색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무척 기품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에게 「이 근처에 청년들이 자취하는 방이 있다는데, 혹시 어딘지 아십니까?」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는 「댁은 어느 회사에 다니는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내 옷차림을 보고 어느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으로 짐작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약간 짧은 치마를 입고, 남자 구두 같은 걸 신고, 聖經(성경)과 찬송가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아닙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나는 예수님을 자랑하고 진심으로 전하고 싶어서 누구를 만나도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보더니 「아, 그러면 우리집으로 들어갑시다.」라고 했습니다. 「집이 어디세요?」 하고 물었더니 「바로 이 집입니다.」라면서 바로 옆집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옥세현 모친이었습니다.


그 집은 바로 우물 옆에 있었습니다. 흙과 돌을 이겨서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집이었는데 어설프게 보였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흙과 돌을 섞어 만든 집이다 보니 벽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형편없어 보였습니다. 지붕은 전쟁 중이라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씨레이션 박스를 펴서 덮어놓은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피난을 온 사람들이 그걸로 집을 많이 지었습니다. 씨레이션 박스는 비가 와도 새지 않아서 지붕을 덮어 놓으면 좋았던 모양입니다. 피난민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을 보긴 했지만 그렇게 작고 초라한 집은 처음이었습니다. 마치 시골에서 담장을 쌓을 때 흙과 돌로 엉성하게 만든 것과 같은 벽이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다다미 두 장도 안 될 정도의 좁은 방이었습니다. 문도 키가 큰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될 정도로 낮았습니다. 벽에는 종이나 신문지 한 장도 발라져 있지 않고 흙벽 그대로였습니다. 천장은 비가 샜는지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고, 방바닥은 검은 비닐조각을 깔아 놓았습니다. 마치 어느 촌 마굿간 같았습니다. 그날 비가 온 뒤라서 방안 풍경이 더 우울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먼저 기도를 한 후 눈을 떴을 때 「참, 세상에 이런 집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방 안에 세간은 아무것도 없고, 옷 한 벌이 걸려 있었습니다. 양복 한 벌이었는데 그 집이나 방과는 어울리지 않게 좋아보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양복은 엄덕문 先生이 아버님께 선물해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방 한쪽에 둥근 밥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의 연필꽂이에 몽당연필이 많이 꽂혀 있었습니다. 세간도 없는 방에 연필이 많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집에는 초등학생이 많은가? 왠 연필이 이렇게 많이 꽂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원필 先生이 그림을 그릴 때 선을 긋기 위해 연필을 많이 깎아 둔 것이라는 걸 후에 들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초라한 집과 방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문득 「사람이 이 땅 위에 태어나서 이런 집에서 일생을 살다가 가면 얼마나 많은 한이 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재림주님으로 오신 아버님께서 다다미 두 장도 안 되는 좁은 집에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버님께서 얼마나 기가 막힌 생활을 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누군가가 간증하면서 「세상에 사람이 땅 위에 태어나서 이러한 집에서 일생을 살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많은 한이 남을까?」 하던 내 말이 두고두고 가슴을 울리더라고 이야기하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출발하셨던 아버님께서 메시아요 구세주요 勝利(승리)하신 천지인참父母님으로, 만왕의 왕으로 정착하실 때까지 얼마나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노정을 걸어 오셨는지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나곤 합니다. 그 집은 부엌도 없어서 집 바깥에서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비가 오면 방안에서 밥을 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어서 텐트를 바깥에 치고 취사를 하곤 했습니다.


…………………………


その日は1952年5月10日土曜日でした。


朝から雨が降っていて、私は教会で静かに祈祷を捧げていましたが、ボンネッコルに住むという変わった青年に会わなければという決心が立ちました。


「会ってみて賢くて神様が用いることのできる者なら、伝道して神様の業(わざ)をする働き人に作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考えをもって、教会を出ました。 午後四時ごろ、道に出てみると雨はほとんど止みかけていました。


しかし、青年の名前も知らず、顔も家も知っていません。ただ女学生が住んでいる家の近くで、男たちだけで自炊して暮らしているらしいという話だけは覚えていたので、外に出ました。ボンネッコルの坂道を上って行きながら、男たちが自炊している家はどこですかと道行く人たちに聞いてみました。


しかし知っている人はいませんでした。聞いてもその当時に自炊して暮らしていた男性が一人二人でしょうか。


それでも、「神様、教えて下さい。会うべき人なら神様がその青年のいるところに導いて下さい。」という信仰を持ってずっと尋ねて回りました。


しばらく迷ったあげく、ある婦人が、「あのてっぺんに登れば井戸が一つありますが、その井戸の横に粗末な家が一つあります。その家に青年たちが住んでいるようです」と教えてくれました。


坂道をずっと登っていくと、なるほど井戸が一つ現れました。鍋で汲み上げる泉のような井戸でした。


井戸で手を洗っていたらきれいな一人のおばさんが水を汲むために井戸に出て来ました。歳は五十数歳ぐらいになりますが、皮膚がきれいてしとやかな方でした。避難時代でしたからカーキ色のチマをはいていましたが、大変気品のあるように見えました。
カーキ(英語:Khaki):
軍服に用いられる淡い茶系色


それでそのおばさんに、「この近くに青年たちが自炊している家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が、もしかしてどこか知っていますか?」と言葉をかけました。


そうしたらそのおばさんが、「あなたはどこの会社に通っていますか?」と聞きました。おそらく私の服の身なりを見て、ある会社に通う会社員と思ったようです。私はひざ下のスカートをはいて、男物のような靴を履き、聖書と賛美歌を脇に挟んでいました。


私は笑いながら、「違います。私はイエスを信じる者です」と答えました。そのころ私はイエス様を愛し、心からイエス様を伝えたくて誰に会っても、「私はイエスを信じる者」と言っていました。それほどイエス様を愛していたからです。


そうしたら、そのおばさんは私の顔を再びまじまじと見て、「ああ、それなら私の家に入りましょう」と言いました。「家はどこですか?」と聞くと、「これがその家です」と言いながら、すぐ横の家に案内してくれました。その方がすなわち、玉世賢(オクセヒョン)オモニでした。


その家は井戸のすぐ横にありました。土と石でこねて積み上げた家でしたが、がさつに見えました。
人の手で土と石を混ぜて作った家なので、壁がなめらかでなく、でこぼこでひどく見えました。


屋根は戦争中で米軍部隊で使う食料箱を広げて覆(おお)っておいたものでした。食料箱は雨が降っても漏れないので、屋根を覆っておくにはよかったようです。


避難民たちがそんな家を建てていたのを見たことはあったのですが、そのように小さくみすぼらしい家は初めて見ました。田舎(いなか)で塀(へい)を作るとき、土と石をおおざっぱに積みあげるのですが、ちょうどそれと似ていました。


中に入って見ると、畳(たたみ)二畳(にじょう)もないほどの狭い部屋でした。 入り口は、背の高い人だとかがんで入らなければならないほど低いものでした。壁には紙や新聞紙も貼ってなく、土塀(どべい)そのままでした。


天井は雨が漏ったのか、ところどころ染みがついていて、床は黒いビニールの切れ端が敷いてありました。それはちょうど、どこかの村の馬屋のようでした。その日はまた、雨が降った後だったので、部屋の中のようすがよりうっとうしいもののように目に入ってきました。


部屋に入ってまず祈祷をして目を開けたとたん、「ああ、一体こんな家でも人が住めるんだなあ」という思いが自然に湧いてきました。


部屋の中には生活道具が一つもなく、服が一着掛かっていました。洋服でしたが、その家や部屋には似合わないほど良い服に見えました。後で知りましたが、その洋服は嚴德紋(オムドンムン)先生が御父様に贈り物として捧げたものでした。


そして部屋の片隅には丸い食卓が一つありましたが、その上には鉛筆立てに短くなった鉛筆がたくさん挿(さ)してありました。生活道具もない部屋に鉛筆がたくさん挿してあるのを見て、私は心の中でおかしいなと思いました。「この家には小学生が多いのだろうか?なぜ鉛筆がこんなにたくさんさしてあるのか?」と思いました。金元弼(キムウォンピル)先生が絵を描くとき、線を引くために鉛筆がたくさん削ってあったものだと後から聞きました。


私はそのときまで、こんなにもみすぼらしい家と部屋を想像してみたこともありませんでした。ふと、「人がこの地上に生まれて、このような家で一生を生きたらどんなに多くの恨みが残るだろうか?」という思いになりました。


今も私は、その瞬間が思い出されるときがあります。再臨主として来られた御父様が、畳二畳にもならない狭い家で人類救援(=救い)の役事を始められたということを考えると、御父様がどれほどひどい生活をされていたのか申し訳ない思いになります。


そのように苦しい状況で出発された御父様がメシアであり、救世主であり、勝利された天地人真の父母様であり、王の中の王として定着されるまでどれほど言い表すことのできない難しい路程を歩んで来られたかを考えれば、熱い涙が出て来もします。


その家は台所もなく家の外でご飯を炊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上、雨が降れば部屋の中でご飯を作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れではどうしようもないので、後になり外にテントを張って炊事をするようにはなりました。